어제는 어머니가 생각하는 '회복'이 무엇인지 여쭤 보았어요. 이전과 같은 길로 가지 않는 것, 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최근 철학 모임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쓰고 말하는 '회복'에서 (회복할 복) 復에는 '길'에 대한 의미가 함께 언급된대요. 영어에도, 그것의 어원에도 길에 대한 의미는 없는데 저희가 말하는 회복만은 그런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요. 신기하죠.
앞선 이야기와 더불어 호스트 분께서 "우리는 회복을 결과의 산치 중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무수한 과정에 가까운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해 주셨는데, 음... 동의하게 되더라고요.
이전 메일에서 회복에 대해 너무 극복의 차원으로 접근한 듯하여 마음에 걸렸어요.
회복 말이에요.
전제가 왜 자꾸만 어디론가 돌아가자는 걸까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빠뜨린 듯해요.
실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요?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내내 같은 자리를 돌게 하는 이 길 옆에는 또다른 길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요.
어쩌면 회복에도 여러 요소들이 갖춰져야 할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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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있었던 일이에요.
자정이 조금 안 된 꽤 늦은 시간인데,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라 달리다 말고,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러닝 코스 옆 산책로에서 중년의 여성 분이 울며 걷고 계시더라고요.
길 잃은 시민을 돕다 인신매매의 위험에 처할 뻔했다는 인터넷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지만 일단 시간이 늦은 만큼,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파출소에 모셔다 드리기로 다짐하며 다가갔어요.
혹시 무슨 일이신지, 도움이 필요하신 건지 조심스레 여쭤 보았더니 "그냥 슬퍼서요. 그냥 지나가세요." 하고 대답하시더라고요.
스쳐 지나간 생각이 부끄러워졌어요. 팔을 활짝 벌려 포옹을 나눴습니다. 울음 소리가 조금 더 커지기에 토닥토닥, 잠시 그렇게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하시는 목소리에 이만 가 보겠다며 꾸벅 인사 드리고, 달리던 코스의 반대편 길로 달렸어요.
문득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안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묵묵히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 속에서 저의 역할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거든요.
때로는 그냥 알고 안아 주는 말과 마음이 필요한 순간에서 역할에 매몰되어 진심이 전복되는 순간도 있었던 듯해요. 이제는 어떤 역할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다른 노력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거겠죠.
포옹을 뒤로한 채 달리며 깨달은 것들이에요.
다음날인 어제, 어머니와 포옹을 나눴습니다. 어머니가 안아 주신 거지만요. 저도 조금은 나아져 볼까 싶어요. 다른 길로 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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