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연기 학원 상담을 다녀왔답니다.
'갑자기?'하고 의아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의 차례가 아니에요. 이것부터 들어 보시죠....
학원에 도착해서 원장님과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성인 취미반의 커리큘럼과 이런저런 교육 철학, 수강생 분들의 사례에 대해 들었습니다. 연기 학원에 그냥 찾아오는 성인은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경청하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느닷없이 제게 물을 한번 마셔 보라는 거예요. 너무 당황스러워서 "갑자기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원장님은 다시 "지금 당장 물을 그냥 한번 마셔 보라"고 하셨어요. 테이블 위엔 종이 서류밖에 없었는데요. 얼탄 표정으로 허공에 보이지 않는 컵을 쥐고 물을 들이켰습니다. 엄청 민망해서 웃음이 새더라고요.
그러자 제게 물어보셨어요. "이 물은 어디에서 온 물이에요?"
저는...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르니까요.... 당장 내가 매일 먹는 쌀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데, 느닷없이 마시게 된 보이지도 않는 컵에 담겨 있던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리가 만무합니다.
원장님이 다시 되물으셨어요. "생각해 봐요. 정수기에서 온 물인지, 물병에 들어있던 물인지." 저는 잠시 생각하다 정수기에서 떠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그럼 정수기에서부터 와 볼까요?"라고 하셨고, 저는 컵을 쥐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다시 들이켰어요.
또 질문하셨습니다. "물은 왜 마셨어요?" 이번 질문은 쉬웠어요. 목이 말랐어요. / 목이 왜 말랐죠? / 종일 마신 물이 너무 적어서요. / 그럼 목이 마른 것부터 시작해 볼까요?
이후로도 이런저런 지시와 질문, 그리고 대답을 주고받았는데요. 곧이어 해 주신 말씀이 유독 와닿았어요. "이걸 분석이라고 해요. 아까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연기는 계속해서 질문하는 일이에요. 저는 답을 찾아줄 수 없죠. 하지만 스스로 알 수 있게 안내할 수는 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모르겠다는 말이 사라질 겁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될 거예요."
저는 그 순간 거의 아르키메데스였어요. 완전히 유레카였거든요. 드디어 머릿속에서 갈피를 못 잡던 나침반이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킨 기분이었습니다. 아직은 너무 어렴풋하지만 그치만, 그래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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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메일에서 나눈 의도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 나실까요?
저는 의도라는 말이 지닌 정념이 너무 어려웠어요. 돌봄과 사랑처럼 이것이 어떤 말인지 당최 모르겠어서 사전의 의미를 수십 번을 읽어 봤습니다. 이걸 정확하게 배치하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건지 영 모르겠어서 곰곰이 생각하다 '연기를 배워 볼까?' 하고 떠오른 거 있죠.
무의식 어딘가 스스로 [내가 할 수 없는 것] 리스트에 꽤나 오래 분류되어 있었거든요. 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야 극 속의 인물 중 의도가 없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숨기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표현과 전달의 방향을 정확하게 배치하고 전환하는 방법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좋은 수단이 없겠다 싶었어요.
무엇보다 저의 삶을 위해 연기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투명한 막 같은 게 저를 감싸고 있어서 감정적으로도 자주 자유롭지 못한 기분이었는데, 이게 저의 예술과 삶에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게 되는 바람에 이 연쇄 작용 자체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원장님께서는 노래를 더 잘하고 싶어서 오게 되었다는 말에 혼자서 똑똑한 선택을 잘했다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낸 것만으로도 칭찬 받을 일이라며, 이런저런 질문과 음악의 본질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들을 말씀해 주셨어요. 앞으로 음악을 대하고, 만드는 저의 태도에 있어서도 몹시 유의미한 대화였습니다.
바로 학원 등록을 하고 싶지만 사정상 금일 등록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런 마음으로 상담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셨어요. 그저 당장 오늘 대화에서 얻어가는 것들이 있기만을 바란다고요. 저는 그렇다면 오늘 정말 너무 많은 것들을 얻었고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장님께서 그렇다니 다행이라며 또 궁금하거나 고민이 생기면 언제든 학원 상담 신청한 번호로 문자 달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상담 오신 모든 분들께 이렇게 말씀 드린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셨고요.
나는 오늘 내게 본질에 대해 질문해 줄 수 있는 어른을 만났구나, 하고 느껴져서 집에 오는 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연기는 이제 [내가 꼭 배우고 싶은 것] 리스트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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